[스포일러 주의]
진정한 팩션 - 사실에 기반한 각색
영화 <관상>은, 본 블로그 리뷰에서 다루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다. 되도록이면 곰삭은 영화들을 들춰내서 '이랬었지' 라는 느낌으로 쓰기 위해 Movie 카테고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교적 최근 영화를 들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니라, 최근 역사 왜곡의 첨단을 걷고 있는 드라마 <기황후>와 너무도 대비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소위 팩션(Faction) 이라는 미명하에, 소속된 나라의 어떤 후세가 보아도, 개인의 감정이나 탐욕에 의해 자신만의 길을 탐하는 악의 축에 속할 인물이, 지나치게 아름답게 그려지는 일은 앞으로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재조명이나 복원이라는 거창한 수식을 빌어, 영화, 드라마의 상업성이나 시청률에 지나치게 현혹되는 모습이 보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기황후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링크 ☞참조 를 하면 되시겠다.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의 조화
영화 <관상>이 팩션의 모범 답안이라는 생각이 드는 첫 번째 부분은, 바로 실존 등장 인물과 역사적 배경의 줄거리가 가상의 등장 인물들의 역할과 함께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있다는 것. 그래서 보는 이가 거부감 없이 스토리 전개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런 짜임새 있는 시나리오의 기획과 연출력이 돋보인다.
극중 실존 인물들인 '문종, 김종서, 수양대군, 한명회', 실제로 발생했던 '계유정난', 그리고 가상의 인물들인 '김내경, 그의 아들인 진형, 진형의 외삼촌인 팽헌, 기녀인 연홍' 등이다. 이 인물들이 배경 줄거리의 전체 역사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절묘하게 서로 작용하고, 결말을 향해 부드럽게 이어진다.
역사적 가상 인물이 후세의 관객 입장에서 논평하다
결국 역사상의 주요인물들은 본래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연기하지만 아무도 내레이션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역사상의 배역에만 충실하게 수행하고, 가상의 인물들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한다.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보았다" 는 등의 어려운 말들은 제쳐 놓고라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들춰 내어 후세의 사람들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도록,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시점의 설정 기법. 참 영민하고 똘똘한 제작진의 기획력이 아닌가?
'황표정사'를 이용한 디테일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잘 된' 부분들이 있지만 나중에 생각이 나면 댓글로 다시 적기로 하고, 아주 깨알 같은 팩션의 디테일이 한가지 있다. 바로 '황표정사' 에 대한 이야기.
영화 <관상>은 이미 많이 알려진 '계유정난' 이 발생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
태정태세문단세...
조종종종종종조
-----------------
조선초기의 왕 계보를 보면, 영화에 나오는 김종서는 태종 재위 시절인 1405년에 16세로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재위 1397~1450) 시절에 등용되어 세종실록,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관한 대표적인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이었다. 1
선대인 세종대왕때의 충신으로 인정 받던 좌의정 김종서를 포함한 의정부(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가, 단종 즉위 후에 왕을 보필하고자 만든 '황표정사' 라는 인재등용 방식이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 실제적인 기록에 근거하여 역사적 의미를 그대로 지니면서도(Fact), 극의 전환점에 중요한 작용을 하도록 각색한(Fiction) 전형적인 모습이다.
극중에서는, 등용할 관리의 명부에 '황표'가 찍힌 대상자가 바로 부녀자 겁탈을 자행하던 탐관오리임(진형이 상경하여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그 장면을 목격)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사건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적 디테일과 장면 전환의 연결 고리가 절묘하게 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 아닌가?
반정의 빌미가 되다
역사적으로 따지고 보면, 황표정사는 김종서가 속한 의정부가 수양대군의 사람을 제외시키고자 관리 추천(천거 대상)자 명부에 노란 표식을 남기면, 판단력이 없는 어린 왕은 이를 형식적으로 승인만 행하면 되는 일시적인 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전제군주국가의 입장에서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 황표정사라는 것 때문에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에 의해 주요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게 되는 중대한 결격사유의 요건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2
여기까지 쓰고 보니, 영화에 대해 극찬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팩션을 아주 잘 구사하고 표현하였다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 하다는 것이다.
영상미와 어울리는 캐스팅과 연기력
몇 가지 더 잘 된 부분들을 꼽으라면, 자연과 사람을 표현하는 영상미, 장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의 세련된 구도와 조명도 칭찬할 만 하다 하겠다. 등장 인물들도, 출연이 거듭될수록 역할에 잘 융화되고 성숙미가 더해 가는 이정재, 늙은 호랑이를 연상케 하는 노련한 백윤식(김종서의 별호가 大虎임), 납득이로 두각을 나타낸 조정석의 감초 같은 연기력 등도 잘 어울린다.
내경이 한명회를 보고 목이 잘릴 상이라고 했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살아 있을 때가 아닌, 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에서 부관참시(무덤을 파헤쳐서 목을 자름)를 당하는 것을 시나리오에서 묘하게 엮은 부분도 깨알 같다. 3
옥의 티 일까, 이해력 부족인가...
아쉬운 부분이라면, 아버지의 결심을 가능케 하는 등의 국면 전환이나 장면의 핵심 인물인 진형(이종석)의 모습이,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어딘가 위화감을 주는 기럭지, 몸놀림과 대사의 어투 등 '잘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느낌이었다(너무 현대적인 이미지라는 의견도 있음).
특히 좀 작위적이었던 부분이기는 했지만, 과거 준비 어쩌구 하는 물음에 "운명에 체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라는 대사. 연출자가 특별히 관객에게 메시지와 복선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하는 부분이 많았었을텐데, 왠지 아쉽다. 죽는 연기에서 비장감이 떨어지는 느낌도 있었다(살짝 울컥~ 하다가 말았던...).
단종역의 채상우는 연기력이 아직은 약하다(99년생) . 적지 않은 비중의 역할이기는 하나, 주요 인물의 연기를 받쳐준다는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개성이 덜하도록 연출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저자거리 장터에서 탈을 뒤집어 쓴 무리와 한명회의 꾐에 빠져 김내경이 납치되는 장면에서, 김내경이 패닉에 빠져 한명회를 붙잡으려 다가서는 장면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 부분이다. 싸움도 잘 못하고 완력도 없는 아저씨가 왜 그랬을까?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극의 처음과 끝에 한명회 역으로 나온 할아버지 배우(우상전)과 극 도중의 젊은 시절 한명회 역으로 나온 배우(김의성)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 원로 배우의 배려 차원이었을지, 특수효과 분장 기술의 한계(라고는 생각지 않음)였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극의 자연스러움을 더 중요시 했다면 한 배우로 밀어 붙여 봄직한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극중 한명회의 목이 한쪽으로 삐뚤어진 것으로 그려지는데(픽션인듯), 그 방향이 왼쪽, 오른쪽으로 자꾸 바뀐다. 결국 노년기의 모습에서는 추나요법으로 나아 진건지 정상인의 모습이다.
영화 비전문가이기에, 칭찬도 비판도 참 가볍다. 보는 이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란다.
채점 들어간다(채점 기준: 5-쩐다, 4-괜찮다 3-참을만하다 2-별로다 1-개망작).
스토리 - 4
연기 - 4, 5프로 안타까운 이종석
비주얼 - 5
감동 - 3, 후반부로 가면서 약간 처지는 느낌.
연출 - 5
총점 21/25, 100점 만점에 84점.
[사족] 하나 더.
여태 그래 왔듯이, 대략적인 줄거리 위주로 세세하게 표현해서 글의 줄 수를 늘이는 수고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스포일링이란 것이 디테일을 남발하다 보면 무감각하게 계속 자행될 수 밖에 없는 속성이 있는지라, 결정적인 부분은 가리거나 슬쩍 건드리고만 지나갈 예정이다. 어쩔 수 없이 볼 여건이 안되는 분들이 나중에 보실 일도 있을테니 말이다.
<다음리뷰>
- Barracuda -
- 함길도 관찰사 시절, 여진족을 격퇴하고 육진을 개척하며 두만강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확립하는 등의 성과를 올린 인물(함길도병마도절제사 겸직)으로, 아마도 이 부분 때문에 많은 이들이 무신(武臣)으로 잘 못 알고 있는 듯하다. [본문으로]
- 쿠데타가 성공하면 반정, 실패하면 역모에서 그친다. 여러 자료들을 조사를 해 보면, 계유정난이라는 역사상 기록된 사건명 자체가, 가까운 후대의 기록관(선대 왕의 후손) 입장으로 볼 때, 역모가 아닌 잘못될 것을 미리 알고 바로 잡았다는 긍정적 해석이 가미된 것이다. 즉, 얼핏 세조반정으로 써야 할 것처럼 보이지만, 찬탈 옹호자 입장에서의 역사 기록인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역사상, ~의 난, ~반정, ~정사, ~의모반, ~민란, ~정변 과 같은 표현들은 있으나 ~정난이라고 쓰인 사례는 계유정난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본문으로]
- 실제로 수양대군의 심복이었으며, 권력 찬탈의 전체적인 계획과 살생부를 만드는 등 참모역할을 하였다. 세조 이후 예종에게 정실 딸인 삼녀를, 성종에게 사녀를 출가시켜 권력의 핵심을 거머쥐었다. 말년을 편하게 보내고자 한강 변에 아호를 딴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었고, 서울의 압구정동이 여기서 유래된 지명이다. [본문으로]
'Entertainments > 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변호인> - 부림사건 배경, 노무현을 조세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4) | 2013.12.09 |
---|---|
영화(애니) 컬러풀(Colorful) - 잔잔한 치유의 감동 (0) | 2013.12.03 |
영화 인 타임 - 허술한 경제 개혁론[반쪽 리뷰] (1) | 2013.11.24 |
영화 울버린의 독립 실패기[반쪽 리뷰] (0) | 2013.11.11 |
영화 롤러코스터의 개그 코드[반쪽 리뷰] (0) | 2013.11.10 |